"36년 전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센병 환자의 절반 가까이 각종 눈병을 앓고 있었어요. 그때 한국에서 시작한 안(眼)질환 퇴치 사업을 이제는 아프리카에서 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함께 말이지요."
폴 코트라이트(59) 남아프리카공화국 '킬리만자로 안(眼)보건 센터'(KCCO) 센터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사람에게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느냐"며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켰다. 연세대 보건대학원에서 아프리카 국가 지원 방안에 대한 6주짜리 특강을 하기 위해 한국에 다시 온 그는 "한국이 많은 역경을 훌륭하게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듯 이제 나도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제2의 한강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코트라이트씨는 미국 UC버클리대에서 감염역학을 전공한 공중보건학 박사로, 세계보건기구(WHO) 자문위원이다. 20년 가까이 아프리카에서 안질환 퇴치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의 개인사는 1979년 한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그는 전남 나주의 한센인 마을로 갔다. 거기서 만난 한센병 환자 300여 명의 절반 정도가 이상하게도 백내장과 토끼눈증(눈꺼풀이 손상돼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센인을 멀리하는 당시 분위기 탓에 제대로 된 치료는 꿈도 꾸지 못했다.
코트라이트씨는 여수에서 한센병 환자의 눈병을 치료해주던 의사 미아 토플 박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반년 동안 매주 월요일 여수로 가서 토플 박사의 환자를 돌보며 진단법을 배웠다"고 했다. 이후 1년 넘게 전남·북과 경남·북에 있는 한센병 환자 정착마을 100여 곳을 돌며 5000명 넘는 환자를 살폈다. 이 가운데 수백 명이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3년 봉사활동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존스홉킨스대와 UC버클리대에서 정식으로 공중보건학을 공부하고 1989년 아프리카로 의료봉사를 떠났다. 이후 경험이 쌓이면서 2001년 남아공에 KCCO를 설립하고 한 해 10만명에 달하는 탄자니아·부룬디·말라위의 환자 치료비를 지원하고 있다. 또 현지 공중보건 인력을 양성하는 '비전 2020' 프로그램도 지원하고 있다. 그는 작년 한국 하트하트재단이 부룬디 내 첫 아동 안보건센터를 건립할 때도 기획단계부터 참여했다.
코트라이트씨는 "아프리카에서는 결막염의 일종인 트라코마가 특히 문제"라고 했다.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실명(失明)에 이르는 질병으로, 한국에서는 1950년대 이후 발병자가 거의 없는 희귀질환이다. 하지만 말라위·부룬디에서는 국민의 무려 20%가 앓고 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의 성장 비결로 '우리 의식'을 꼽았다. 내가 아니라,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공동체 의식이 성장의 원동력이 됐을 것이란 얘기다. "한국이 그 정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의 일부 독재국가와 달리 빠른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뤄낸 것 아닐까요? 저는 아프리카의 보건 담당자들에게 자주 '당신들도 한국처럼 한강의 기적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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