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스토리   >    언론보도

(중앙일보) [Week&Cover Stroy] '하트-하트윈드오케스트라'의 꿈

등록일:2008-11-25 조회수:53,015

 
무대에 지휘자가 서고 연주가 시작됐다. 오케스트라 단원 한 명이 갑자기 “엄마!” 하고 소리를 지르며 무대에서 뛰어 내려왔다. 불안한 눈빛으로 클라리넷을 불던 다른 단원도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이거 악기!” 금세 알아차린 엄마가 리드(입에 물고 공기를 불어넣는 부분)를 가지고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건조한 무대 위에서 리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연주는 끊김 없이 계속됐다. 9월 있었던 ‘하트하트 윈드 오케스트라’의 미국 시카고 연주회 장면이다.

 
 
모두 21명이다. 열네 살 된 아이도 있고 스물일곱 먹은 청년도 있다. 그런데 다들 어눌하다. 스무 살 넘어 말문을 연 사람도 있다. 자폐가 몸을 묶고 정신지체가 영혼을 흔들었다. 이들을 이은 건 음악이었다. 플루트 앞에서 마음을 열었고 트럼펫을 불면서 세상과 만났다.

지휘자 박성호(34)씨는 “처음에 단원들을 의자에 앉히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단원들은 제멋대로였다. 연습 시간은 난장판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런 ‘천방지축 연주단’이 2006년 창단 연주회를 열었다. 그해 세 차례 연주했다. 지난해에는 무대에 15회 올랐다. 병원·복지시설 등에서 초청이 잇따랐다. 9월 말에는 미국 시카고·로스앤젤레스를 돌며 일곱 차례 연주했다. 시카고 교외 지역인 앨름허스트에서는 9월 28일을 ‘하트하트 윈드 오케스트라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10월 23일 특별음악회가 열린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글=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아름이는 트럼펫과 이야기해요


이야기 둘 제 딸 송아름(15)은 트럼펫을 불어요. 오케스트라에서 제일 ‘졸병’이에요. 지난해 11월 단원들 중 가장 늦게 입단했거든요. 아름이는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어요. 학교에서 친구들이 하는 욕을 갑자기 내뱉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 노래를 불러 주기도 하죠. 대화는 당연히 안 돼요. 툭하면 신경질을 내고 짜증을 내니 친구가 없어요. 자폐 2급입니다.
 
지난해 겨울 어느 날 아름이가 갑자기 없어졌어요. 삼성서울병원 앞에서 겨우 찾았어요. 아름이는 “언니 예름이를 데려와야 한다”며 좀처럼 집에 오려 하지 않았어요. 예름이는 2004년 8월 세상을 떠난, 아름이의 쌍둥이 언니지요. 딸들의 백일 즈음에 택시 운전을 하던 남편이 강원도 동해에서 새 사업을 해 보겠다고 하여 이사 갔지요. 주위에 이웃도 얼마 없었고 아이들이 그저 예뻐 집에서 한글과 숫자 같은 것만 가르치면서 길렀죠. 다섯 살쯤 됐을 때 아이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뭘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고, 낯선 사람을 보면 심하게 울거나 도망갔어요. 다른 사람과 감정을 전혀 못 나누었지요.

두 딸이 똑같은 증상을 보이자 죄책감이 저를 괴롭히더군요. ‘아이들을 너무 방 안에서만 길렀나 보다. 사회성이 자랄 틈을 주지 못했구나. 못 배운 엄마 때문에 고생만 하는구나’. 괴로운 마음에 두 아이를 다 감당할 수 없었어요. 아이들은 고모·외할머니 집을 돌아다니며 서로 떨어져 지냈어요. 몇 년 후 예름이는 상태가 좋아져 일반 유치원에 갈 수 있을 정도가 됐지만, 아름이의 자폐 증상은 여전히 심했지요. 말을 알아듣는지 알 수 없었고 돌발 행동을 계속했죠. 연주회에 와 보시면 남들 다 앉을 때 혼자 서 있고, 연주 중에 자리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트럼펫 소녀를 볼 수 있으실거예요

엄마와 대화도 할 수 있게 됐던 예름이는 악성 림프종 판정을 받은 뒤 두 달을 못 버티고 떠났어요. 차라리 자폐가 심한 아름이를 하늘이 데려가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그 무렵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어요. 구에서 해 주는 음악 교육 프로그램에 지원할 자격이 있다고 했어요. 여자아이들이 잘 안 하는 트럼펫을 시켰어요. 웬일인지 악기하고는 대화가 되는 것 같더군요. 자기가 부는 대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대로 소리가 나는 트럼펫과는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아름이는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를 제일 못 불지도 몰라요. 뿡뿡거리는 소리가 제 귀에도 이상할 때가 많거든요. 하지만 장미 가시에 찔려도 아프다는 말을 못 하던 아이가 다른 사람과 맞춰 가며 연주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믿을 수 없어요. 아름이가 지금은 언니의 몫까지 살고 있는 것도 같아요.
 
 



 

클라리넷 불 때 성호는 딴 사람


이야기 셋 제 아들은 항상 흰 장갑을 끼고 다닙니다. ‘하트하트 윈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맞은편에 앉아 클라리넷을 부는 은성호(24)입니다. 손의 살을 하도 손톱으로 뜯어 꼭 장갑을 끼게 하죠. 성호는 악기를 연주할 때만 장갑을 벗습니다. 누가 말을 시켜도 똑같이 로봇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고집이 셉니다. 어찌나 책에 관심이 많은지, 이번 미국 여행에서도 책 읽고 있는 사람만 보이면 달려가 그 책을 들춰 보는 바람에 혼이 났습니다.
 
성호에게 처음 음악을 시킨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발달장애 2급으로 특수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음악 수업 도중 우연히 앉게 된 피아노 앞을 떠나지 않았다더군요. 선생님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피아노 레슨을 시켰지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곡을 자유롭게 조옮김하거나, 음악을 한 번 듣고 외웠습니다. 피아노 전공자도 쉽지 않은 일이죠.

생후 15개월쯤부터 말을 잃어 가더니 20개월쯤에는 한마디도 나눌 수 없게 됐습니다. 눈을 마주치는 것도 힘들었죠. 사회성은 5~6세짜리보다 못했고요. 그런데 집중력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음악을 할 때만큼은 다른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았답니다. 내친김에 클라리넷까지 시키고 오케스트라에 들여보냈죠.

지금은 저와 짧게나마 말을 합니다. “오늘” 이렇게 운을 떼면 “오늘은 클라리넷을 연주하게 됩니다”고 하고 “비제의”라고 하면 “비제의 카르멘 환상곡을 연주하게 됩니다”고 말을 잇습니다. 그래도 말을 해놓고 얼른 도망가는 것은 여전합니다.

성호의 동생 건기(18)는 “엄마는 죽을 때까지 형을 돌볼 거야?”라고 묻습니다. 자기 혼자 머리도 못 감고 지하철도 못 타는 형 옆에 꼭 붙어 다니는 저 때문이죠. 음악을 전공하고 싶어 하는 건기는 제가 빠듯한 살림을 나눠 형에게 쏟아 붓고, 뒷바라지하는 모습에 가끔 심통을 냅니다. 그럴 만도 한 게, 성호가 레슨을 할 때는 건기가 레슨을 받지 못하거든요.

제가 이러는 건 성호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입니다. 성호를 임신했을 때 마침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이가 나오기 한 달 전쯤 너무 많이 울었죠. 저 때문에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 같았어요. 아이들의 아버지와는 10년 전쯤 헤어졌죠. 혼자 키우면서 아이들이 더 애틋해졌습니다.

문제는 제가 세상을 떠난 다음이겠죠. 작은 아들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 시설을 알아봤습니다. 요즘에는 거기에 들어가는 돈을 모으는 것이 목표예요. 그런데 저 말고 누가 이 아이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음악은 언젠가 혼자가 될 성호에게 제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입니다.

무대 위에 스물한 개의 세상이 있다. 무대 아래 또 스물한 개의 세상이 있다. 무대 위의 세상에는 악기의 선율이 흐르고, 무대 아래의 세상에는 엄마의 사랑이 흐른다. 마흔두 개의 세상이 꿈꾸는 세상은 하나다.

‘하트하트 윈드 오케스트라’는 27일 오후 7시30분 서울 신사동 장천아트홀에서 제3회 정기연주회를 연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세상. 나눔은 사랑입니다.후원하기

목록